Kenji Mizoguchi [우게쯔 이야기 雨月物語 Tales Of Ugetsu] 1953, 일본, 97분

 

 

 ‘우게쯔 이야기의 기괴한 얘기들이 현대인의 마음에 와 닿을 때 더욱 다양한 환상을 일으킨다.’는 문구로 시작하는 미조구치 겐지의 『우게쯔 이야기』. 이 영화는 환상과 현실에 관한 이야기다. 감독은 영화 내에서 내러티브 구조, 표현 기법 등 많은 부분에서 현실과 환상을 대립시키면서 우리에게 현실과 환상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감독은 환상이 정말 기괴하고 현실이 아닌 환상이라는 것과 더불어 우리가 허황되게 꿈꾸는 것 역시 환상이라는 시각에서, 그러한 환상이 현실을 망치고 결국엔 현실이 우리의 삶이며 가장 중요한 것임을 영화를 통해서 이야기 한다.

 

 먼저, 극의 전체 흐름에서 두 요소가 충돌함을 알 수 있다. 영화는 현실로부터 시작한다. 그러한 현실이 붕괴되고 무너지는 것은 환상에 의해서이다. 아무런 문제없이 잘 살아가던 겐주로와 미야기의 삶이 무너지는 것은 겐주로에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환상이 나타나면서부터이다. 미야기는 그러한 환상을 경계하면서 겐주로를 만류하지만 겐주로는 결국 환상에 빠져 그 달콤한 맛에 빠진다. 처음에는 그러한 환상이 겐주로에게 만족을 가져다주지만, 한 번 빠진 환상의 맛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겐주로는 계속해서 돈에 대한 환상에 집착하게 되고 결국엔 진짜 환상(와카사)에 빠져서 모든 것을 잃고 만다. 그는 현실 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것이라 할 수 있는 사람, 즉 아내를 잃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병행해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이야기의 토베이와 오하마 역시 그러한 구조를 가진다. 토베이 역시 사무라이라는 환상에 빠져서 현실을 망각한 채 내팽겨 치고, 그로인해 현실의 아내가 창녀가 된 후에야 다시 현실로 복귀한다. 영화의 구조는 현실과 환상의 대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환상은 현실을 벗어나게 하지만, 또 현실로 돌아가게 만드는 기능을 하면서 모순적인 구조를 가진다. 즉, 환상은 두 가지 역할로 나타나는데 현실을 망각하고 도피하게 하는 부정적인 환상과, 다시 현실로 복귀시키고 환상의 부질없음을 깨닫게 해주는 긍정적인 환상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환상의 표현 방식을 살펴보면서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그럼 먼저 이러한 구조적 바탕에 따라 감독이 영화 전체에 있어서 현실을 어떻게 표현하는 지 살펴보자. 감독은 당연히 환상보다는 현실을 비중을 더 많이 두고 있는데, 이로 인해 영화 전체적인 표현은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런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연출을 위해서 감독은 잦은 편집을 자제하고 롱 테이크를 즐겨 사용한다. 또한 클로즈업의 사용은 줄이고 주로 롱 쇼트를 사용한다. 중간에 장소가 바뀔 때마다 롱 쇼트를 이용해 설정 쇼트를 보여주고 이를 통해 사회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전국 시대 일본의 모습을 보여주고, 서민들의 삶도 함께 보여준다. 전쟁의 피해로 폐허가 된 집들이나 굶주림에 좀비처럼 변해버린 패잔병들, 돈을 벌기 위해 북적거리는 시장의 모습 등은 전국시대 일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카메라와 피사체의 거리에 있어서도 클로즈업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대부분 롱 쇼트를 사용한다. 클로즈업을 배제함으로써 인물들에게 강한 감정 이입을 하지 않고 그들을 사회적인 시선에서 바라본다. 초반에 시바타 군대가 마을로 쳐들어와서 약탈하고 아녀자를 강간하는 장면, 미야기가 굶주린 병사들에게 죽는 장면이나 오하마가 남편을 잃어버린 뒤 사무라이들에게 강간당할 때에도 결코 클로즈업이나 잦은 컷을 사용하지 않는다.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담담히 그러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사실성을 높이는 동시에 그러한 사건이 단순히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사회의 비극이라는 느낌을 강조한다.

 

 이제는 반대로 영화에서 현실과 대립하는 또 다른 축인 환상을 어떻게 표현하면서 표현적으로 현실과 대립시키는 지 살펴보자. 영화에서 환상을 묘사할 때 카메라, 미장센, 음악 등에서 현실을 표현하는 것과 다른 특성이 나타난다. 카메라에 있어서 클로즈업은 거의 쓰이지 않는데, 가끔 쓰이는 클로즈업들은 모두 환상적인 요소를 표현한다. 예를 들어, 토베이가 자신의 환상(멋진 사무라이)을 획득하기 위해 적장의 목을 벤 사람을 기습해 목을 가로채는 장면에서 그 환상을 가지러 기어가는 토베이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즉, 환상에 대한 열망이 가장 높아졌을 때 클로즈업을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미장센에 있어서도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표현하는 것과 달리 기괴하거나 정말 잘 정리된, 아름답고 환상적인 미장센을 보여주고 기묘하고 음산한 음악을 사용함으로써 청각적으로도 현실과 대비된 환상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영화에서 환상적으로 연출된 첫 번째 부분은 네 인물이 시바타 군대를 피해 도기를 팔기 위해 배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는 엄청난 안개를 뚫고 배와 인물들 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안개는 거의 연기처럼 진하게 끼여 있어서 마치 꿈이나 동화 나라의 모습처럼 보인다. 더욱이 배경 음악까지 음산해 그러한 환상적이고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배경음악은 영화를 보다보면 오하라의 노래 소리인 것처럼 들리지만 오하라의 모습이 나타나고 나면 그녀가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더욱더 이 장면을 기괴하게 한다. 그런데 또 오하라를 보여주다가 그녀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노 젓기를 멈출 때, 노래가 멈춘다. 이는 정말 기괴하고 섬뜩한 연출이다. 그러고 나면 의문의 배가 등장한다. 배 위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자기를 소개할 때 영화 처음으로 클로즈업이 쓰인다. 감독은 영화 내내 클로즈업을 몇 번 쓰지 않는데, 그 클로즈업은 모두 환상적인 인물을 보여줄 때에 쓰인다. 이 인물 역시 환상의 인물로써 극 전체에서 환상이 가지는 기능을 수행하는 역할을 한다. 즉, 환상의 헛됨을 경고하고 현실로 돌아가게 하려는 역할을 한다. 대사를 살펴보면 이 죽어가는 인물은 돈을 뺏는 해적을 조심하라고 한다. 해적은 사실 돈만을 추구하려는 겐주로와 토베이를 상징한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다 빼앗긴다고 하면서 특히나 여자들을 조심하라고 한다. 이것은 결국 이 경고를 무시하게 되었을 때 피해 입는 것은 여성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미야기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다시 환상을 향해 나아가고, 결국 돈을 얻고자 하는 해적과 같은 욕망은 오하마를 창녀로, 미야기를 죽음으로 이끈다.

 

 두 번째로 환상이 나타나는 것은 시장과 비단 가게에서이다. 처음에 와카사와 그의 유모는 겐주로가 도기를 팔고 있을 때 나타난다. 이 장면에서 흥미로운 것은 귀한 복장을 하고 눈에 띠는 와카사지만 시장에 있는 그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명도 그들을 쳐다보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히 그들이 귀신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그러고 나서 겐주로와 그들은 비단 가게 앞에서 다시 한 번 마주치게 되는데 와카사를 보여줄 때 또 한 번 클로즈업이 사용된다. 아무런 대사나 별다른 이유 없이 자주 쓰지 않는 클로즈업을 보여주는 것은 그녀가 환상의 인물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 장면에 바로 앞서서 이들이 나타나기 전, 겐주로가 비단 가게에 있는 신 역시 환상의 연출이 나타난다. 바로 비단을 보면서 집에 있는 미야기를 떠올리는 것인데, 클로즈업된 비단이 현실에서 환상으로 이어주는 매개가 된다. 비단을 클로즈업 하고나서부터 소리 역시 환상적인 분위기를 나타내는 음악이 흐른다. 클로즈업된 비단과 음악이 흐르고 그 비단 옆으로 일하고 있는 미야기가 나타나는 환상이 펼쳐진다. 디졸브나 다른 어떠한 편집 등의 화면 전환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소리와 클로즈업만으로 연출된 환상은 매우 세련된 연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환상을 깨는 것은 앞서 말한 와카사의 환상이다. 첫 번째 환상이 현실로의 복귀를 경고하는 역할을 하는 도중에 현실을 도피하고 망각하게 하는 두 번째 환상이 나타나 방해한다.

 

 이 다음부터는 본격적으로 환상의 세계가 나타난다. 그 세계는 바로 쿠츠키 저택이다. 쿠츠키 저택으로 가는 길에서부터 음산한 음악이 나타면서 지금 들어가는 곳이 현실 세계가 아님을 나타내는 단서들이 등장한다. 집으로 가는 길 근처에는 아무런 집도 하나 없고 잡초가 길게 자란 황무지이다. 더군다나 대문과 저택의 입구 부분은 이미 폐허가 되어있는 상태다. 그리고 그들이 이동하는 모습을 그림자로 보여주는 것은 실제가 아닌 허상, 환상의 인물들이 걷고 있다고 느껴진다. 그들이 집안으로 들어서고 나면 상황은 바뀌어 아주 그럴듯한 대저택이 펼쳐진다. 하지만 새로운 저택들이 펼쳐진 곳을 처음 보여줄 때 프레임의 전경 대부분을 앙상한 나뭇가지가 차지한다. 이것은 지금 보여주는 것들이 사실은 황량하고 실제가 아닌 폐허라는 것을 시각적 이미지로 느끼게 한다. 하지만 점점 환상 깊숙이 들어가면서 잎이 무성한 소나무가 프레임을 차지하고 카메라가 멈춘 후 부터는 완전한 환상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지금까지와는 정반대의 미장센이 나타난다. 지금까지는 주로 전쟁 상황 속의 피폐한 사회와 고달픈 사람들을 보여주고 적나라하게 살아가는 생필품 등을 보여주었는데, 이제는 그러한 것들이 사라지고 아주 아름답고 정갈한 미장센이 나타난다. 생활을 위한 물건은 하나도 없이 장식품과 그림들, 그리고 노와 같은 귀족적인 문화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방석, 벽지, 또 가재도구 등에서는 기이한 기하학적 패턴의 문양이 등장해 환상적이고 기이한 모습을 더욱 강화시킨다. 그리고 계속해서 아주 아름다운 숲 속의 온천과 호숫가의 아름다운 정치 등은 미장센의 아름다움의 절정을 보여준다. 완전히 현실 세계와는 다른 미장센의 아름다움을, 현실의 사실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양식의 표현을 볼 수 있다. 이 저택 시퀀스에서 하나 재미있는 것은 겐주로가 처음 저택에 들어와 앉을 때부터 와카사 아버지의 투구가 그의 머리 바로 위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이는 앞으로 겐주로가 와카사의 아버지와 같은 역할, 혹은 이 집의 가장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의 환상 표현 기법은 겐주로가 집으로 돌아와 미야기와 재회하는 장면에서 나타난다. 처음에 그가 집에 들어왔을 때는 아무도 없었는데 그가 집을 돌고 돌아오자 미야기가 나타나있다. 미야기가 환상이라는 것은 등장과 함께 시작되는 들리는 기묘한 음악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겐주로는 바라보며 눈물짓는 미야기, 환상을 또 다시 클로즈업한다. 감독은 두 인물이 다른 세계에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소품을 이용한다. 화롯불을 앞에 두고 앉은 두 사람을 냄비를 달고 있는 끈이 갈라놓고 있다. 끈은 아주 선명하게 프레임을 둘로 나누어 환상의 미야기와 현실의 겐주로, 겐이치를 갈라 놓는다. 이는 시각적으로 둘이 함께 있지만 실은 함께 있는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지금까지 본 것과 같이 현실과 환상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두 요소가 계속해서 대립한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은 카메라나 음악 등의 표현 양식 이외의 다른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우선은 특정 행위의 대립이다. 현실에서는 계속해서 먹는 장면이 나타난다. 현실, 즉 삶은 결국 먹고 사는 문제라는 것이다. 특히나 환상과 강하게 대비되는 상황에서 먹는 장면은 꼭 등장한다. 처음은 영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겐주로가 처음으로 환상을 향해 갔다가 돌아온 때이다. 이 때 비단 기모노를 입는 겐이치 앞으로 꼬치를 먹는(현실로 돌아온) 겐주로가 있다. 그는 계속해서 사온 음식을 꺼낸다. 두 번째로는 도기를 구워서 돈을 벌고 싶어 하는 환상이 전쟁으로 인해 강제로 무너져 현실로 돌아왔을 때이다. 숲 속에 피난해 있는 겐주로에게 미야기가 음식을 가져다준다. 다음에는 현실을 살아가는 패잔병들의 모습인데 그들은 먹는 것에 가장 집착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에 먹는 것에 관련되어 미야기는 살해된다. 마지막으로 겐주로가와 토베이가 모든 환상을 뿌리치고 돌아왔을 때 오하마는 겐주로에게 먹을 것을 건넴으로써 현실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다. 이와 반대로 환상에서는 생존과 관계없는 술이나 차를 마신다. 배를 타고 갈 때, 겐주로가 쿠츠키 저택에 처음 들어갔을 때, 토베이의 환상이 이루어져 사무라이가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겐주로가 돌아와 미야기가 맞이하는 장면에서 술이나 차를 마신다. 이는 결국 환상은 술이나 차와 같은 사치스러운 것이고 현실은 먹는 것과 같이 핵심적인 것임을 나타낸다.

 

 영화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구조도 현실과 환상의 충돌의 형태로 제시된다. 현실과 환상이 엇갈리는 극과 극의 부분에서 두 장면은 충돌한다. 사무라이가 되고픈 환상을 쫓는 토베이가 결국에 갑옷과 창을 사는 장면과 그의 부인인 오하라가 사무라이들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이 연결되어 그 충돌의 강도를 높인다. 더욱이 그가 갑옷을 입고 큰 창을 들고 갑옷을 찌르는 순간, 부인은 갑옷을 입고 큰 창을 든 사무라이에게 강간을 당한다. 결국 사무라이가 되려는 환상을 가진 토베이가 오하라를 그렇게 만든 것과 다름없다는 표현이다. 겐주로의 경우에서도 그가 환상에 대한 열망이 가장 극에 달했던 장면, 호숫가에서 와사카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클로즈업 됐을 때(환상에 대한 욕망이 가장 클 때 클로즈업), 그의 부인이 죽는 장면이 연결된다. 이렇게 환상에 대한 열망과 욕망이 가장 큰 상황에서 가장 비참한 현실을 연결하는 사건들의 조직 방식은 환상이 현실을 황폐화하고, 특히나 남자들이 여자들을 망쳐놓는다는 감독의 의도가 잘 드러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현실과 환상의 대립은 도기를 대하는 태도이다. 현실에서 도기는 먹고 사는 수단일 뿐이다. 그는 도기를 정성들여 굽고 목숨을 위태롭게 도기를 지키려하지만 그런 그를 현실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않는다. 목숨, 현실, 삶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상의 세계에서 와카사는 도기를 예술로서 인정해주고 그 가치를 치켜세운다. 결혼을 위한 목적도 이러한 도기를 굽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서라는 다소 황당한 이유를 내세운다. 환상에서는 도기를 굽는 것이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예술이며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다. 즉, 사치스러운 면을 강조한다. 이에 반해 현실에서 도기를 굽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함이고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엔딩 장면에서도 먹고 살기 위한, 다시 현실을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도기 굽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요약하면 영화는 계속해서 환상과 현실을 대립시킨다. 감독은 이를 통해서 현실의 가치에 비중을 두고 있다. 환상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으며, 결국에는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허황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감독의 시선을 사회적으로 확대해 보면 전쟁은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라는 것은 사실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닌 허세나 과시 등의 사치스러운 것의 결과라는 점이다. 이는 토베이의 경우에서처럼 사무라이에 대한 환상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사무라이들과 같이 전쟁을 이끄는 사람들은 결국에 어떤 실체가 아닌 환상을 쫓는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환상이 결국엔 민중들의 삶을 황폐화하게 하고 망친다. 이러한 사회적인 관점은 다시 남자와 여자의 관계의 관점으로 이어진다. 전쟁을 일으키고 주도하는 남자들이 실제적인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인 여자들을 괴롭히고 망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남자를 환상으로, 여자를 현실로 보는 것은 적어도 영화 내에서는 타당하다. 겐주로와 미야기, 토베이와 오하마의 각 이야기들은 모두 남자라는 환상이 여자라는 현실을 어떻게 무너뜨리고 망가뜨려놓았는지 잘 보여준다.

 마지막으로는 와카사에 대해 생각해보자. 과연 와카사는 환상이면서 여자(현실)인 모순적인 인물인 것일까. 그녀는 과연 이러한 이분법의 구도에서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와카사의 분신은 유모가 버림 받으면서 하는 대사에서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남자는 한 번 그런 실수를 할 수 있겠지만, 여자는 아니에요.” 결국 와카사 역시 패권싸움이라는 환상에 의해 버림받은, 현실이 될 기회조차 잃고 환상이 되어서도 현실을 추구하려는 그런 가장 가련한 피해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Posted by 허호필

저널리즘(Journalism)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미디어와 많은 관련성이 있는 저널리즘은 미디어의 폭 넓고 급격한 변화에 따라 그 의미가 확장되고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개념 역시 변하는 것이라면, 결코 변하지 않는 저널리즘의 근본적 속성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에 따라 변하는 상황 속에서는 또 어떠한 속성과 의미가 새롭게 개념화되어야 하는지 살펴봐야할 것이다.

 

 먼저 저널리즘이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 'diurna'이다. ‘매일 매일 기록한다.’는 뜻의 이 단어는 프랑스어 'journal'으로 발전하고, 이것이 또 영어로 발전한 뒤, 접미사 '-ism'이 붙어 생겨난 말이다. 즉 이러한 어원을 바탕으로 현재 연세한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신문, 잡지, 방송 등 인쇄, 전파 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정보와 의견을 제공하는 활동이나 사업.’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우병동, 정일형, 김용성, 2007).

 

 저널리즘에 대한 또 다른 정의를 살펴보면, 한국언론연구원에서 발행한 매스컴 대사전의 언론활동이나 이러한 활동분야로서 시사적 문제에 대한 뉴스 등을 취재, 편집해서 신문, 잡지, 언론 등을 통해 보도, 논평, 해설 등을 하는 활동, 또는 이 활동을 전문적으로 하는 직업 분야(한국언론연구원 편, 1993).’나 방송문화진흥회에서 발행한 방송대사전에서 정의한 시사적인 정보, 현상, 의견을 사회에 널리 전파하는 활동(방송문화진흥회 편, 1990)’ 등이 있다.

 

 위의 많은 저널리즘에 대한 정의를 바탕으로 볼 때, 저널리즘이란 것은 크게 미디어를 통해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말대로라면 축구 중계나, 오락 프로그램도 저널리즘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전달되는 메시지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미디어의 측면에서도 전화나, e-mail을 통해서 전달하는 것이 아닌 대중을 대상으로 전달하는 매스 미디어를 의미한다. 다만, 최근 급격한 미디어의 발전에 따라서 매스 미디어로 분류되지 않지만,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을 가지는 뉴 미디어가 등장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의 역시 필요하다.

 

 즉, 저널리즘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널리즘이라는 활동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어떠한 것인지, 또 이에 따라 미디어는 어떻게 이용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히 기존의 신문과 방송을 이용한 정기 간행물이라는 정도의 좁은 의미로 저널리즘을 설명하는 것은 저널리즘의 다양한 특성과 영향 등을 간과하는 결과이고, 따라서 저널리즘에 대한 폭넓은 인식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우병동, 정일형, 김용성, 2007)

 

 그렇다면 먼저 저널리즘이 다루는 메시지는 어떠한 것인가.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뉴스가 저널리즘의 메시지가 된다. 하지만 뉴스라는 것은 기존 매스 미디어를 저널리즘의 모든 주체라고 봤을 때의 용어이기에, 구체적으로 저널리즘이 다루는 메시지가 어떠한 지 살펴봐야한다. 학자에 따라 저널리즘의 요소나 기능을 분류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가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개념이 진실성과 시의성, 또 독립성이다.

 

 진실성은 저널리즘이 다루는 메시지가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닌 진실 탐구는 창작된 문화 예술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저널리즘에 있어서 진실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사실을 바탕으로 의견과 입장이 들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의견과 입장 역시 사실을 바탕으로 나온 결과이어야 한다. 물론,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고 해도 저널리즘 주체의 의견이 진실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진실은 쉽게 진실이라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자인 우드워드(Woodward)최선을 다해 얻을 수 있는 진실에의 한 해석”(Brooks et al., 1988. 20쪽에서 재인용)이라는 진술처럼 저널리즘 주체는 진실을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널리즘은 활동 주체의 진실을 찾기 위한 윤리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윤리성의 문제가 최근 미디어의 상업화로 인해 훼손되고 있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에 저널리즘 붕괴’, ‘저널리즘 위기라는 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저널리즘의 진실성을 통해 저널리즘의 존재 목적을 찾아낼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진실을 탐구하려는 욕망이 있다. 하지만 커져가는 사회 속에서 모두가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저널리즘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혹은 집단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또한 미디어의 발전에 따라 한 번에 다수에게 메시지 전달이 가능해지면서 현대적 저널리즘이 탄생했다. , 미디어를 이용해 진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탐구하기가 어려운 것은 물리적 이유 보다는 정치적인 이유가 크다. 진실을 가리려는 권력과 무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널리즘에는 다음 특성인, 독립성이 요구된다.

 

 그래서 저널리즘의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가 바로 독립성이다. 다른 말로는 자율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저널리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진실성을 지키기 위한 요소가 된다. 저널리즘이라는 활동은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서 시작되거나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저널리즘 주체 스스로 내린 판단과 스스로 찾은 사실을 바탕으로 독립적으로 형성된 메시지이어야 한다.

 

 다음은 시의성이다. 저널리즘 메시지는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예전의 지식을 다시 알리는 것은 단순한 역사를 알리는 것이다. 새로운 것이야 말로 저널리즘이 갖춰야할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이 새로운 사실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최신성 혹은 즉시성을 말하지만 꼭 시간적인 의미는 아니다. 예전의 사건이나 이슈 속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 진실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진다면 그것 역시 저널리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탐사 저널리즘은 기존에 감춰져 있던, 혹은 드러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고 그에 따라 새로운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다(이민웅, 2003).

정리해보면 저널리즘이라는 것은 누구에게 간섭받지 않은 주체가 진실에 대한 새로운 메시지를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전통적으로 정의하던 저널리즘에서 가장 핵심만을 뽑아내어, 시대나 상황에 관계없이 저널리즘이 가지는 속성인 것이다. 문제는 미디어의 변화로 이러한 속성이 나타나는 채널이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널리즘이라는 개념에 대한 혼란이 일어나고, 과연 저널리즘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저널리즘이 무엇인가를 정의했기에 이제는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저널리즘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야 할 차례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많은 변화를 가지고 오는 미디어의 변화란 무엇인가. 이러한 변화의 핵심은 디지털과 인터넷이다. 컴퓨터로 대표되는 디지털 방식은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을 대체했다. 디지털로의 변화했다는 것의 의미는 그 정보 처리와 전달 속도가 현저하게 빨라지고, 아날로그 방식에서는 함께 취급할 수 없던 소리, 영상, 이미지, 텍스트 등이 함께 처리되어 방송과 통신 등의 영역 역시 무너지게 하는 변화를 이끌고 왔다는 것이다(김병철, 2005). 인터넷은 커뮤니케이션에서의 변화를 가져왔다. 정보의 교류가 다수와 다수가 비동시적이고 개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즉 전 세계의 사람들이 정보를 동시에 즉각적으로 공유할 수 있게 되었고, 또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기존의 미디어와 다르게 인터넷은 접속하는 모든 주체가 정보와 메시지를 창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누구나가 미디어를 소유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렇게 디지털과 인터넷의 발달은 다양한 플랫폼의 미디어를 등장시켰다. 기존의 한정되어있던 미디어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었고, 따라서 늘어난 미디어의 채널만큼 대중의 미디어 집중도는 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저널리즘의 주체라 할 수 있는 기존 미디어의 파워는 약해졌다. 늘어난 저널리즘의 주체가 늘어난 신문사나 방송사의 숫자라서 저널리즘 파워가 약해진 것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인터넷에 의해 미디어 주체가 인터넷을 이용하는(사실상 모든 사람) 사람 모두가 될 가능성이 있고, 많은 사람이 그렇게 주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엄청난 변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미디어의 특성과 경험에 있어서 기존의 전통 미디어와 새롭게 등장한 미디어의 전문성과 신뢰성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한가. 새롭게 등장한 비전문적 미디어인 트위터가 가장 먼저 전달했던 아이티 지진은 저널리즘으로서 가치가 없는 것인가. 개인 블로그에 방문했던 식당의 청결성의 문제를 올린 것, 전문성이라고 전혀 없는 한 초등학생이 핸드폰으로 찍어서 올린 과도한 체벌 영상은 저널리즘인가 아닌가. 어떤 기존 미디어도 포착하지 못했던, 자동차의 결함을 UCC로 제작해 올려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 낸 것은 어떠한가. 이에 대해 저널리즘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과연 저널리즘의 의미는 새롭게 바뀌는 것인가.

 

 필자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위에서 스스로 정리했던 저널리즘에 대한 정의에 대해 생각한다. ‘누구에게 간섭받지 않은 주체가 진실에 대한 새로운 메시지를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 정의에 따르면 트위터의 메시지도, 블로그의 글도, 초등학생의 영상도, 자동차 UCC도 모두 저널리즘의 결과이다. 이 모두가 저널리즘인 것이다.

 

 그렇지만 선뜻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이기 멈칫하는 것은, 이러한 비전문적이고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나타나는 메시지 중에 저널리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매우 극히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 블로그나 UCC, 트위터를 모두 저널리즘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실 이러한 새로운 저널리즘에 대해 UCC 저널리즘이나 트위터 저널리즘으로 일반화해 부르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 속에 존재하는 저널리즘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앞으로 어떻게 하면 이러한 뉴 미디어 속에서 저널리즘이 더욱 잘 발현되고 유지될 수 있을 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요약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저널리즘을 행사하던 주체를 신문사나 방송사 등 특정 미디어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속한 개인들 역시 저널리즘의 주체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 저널리즘의 주체가 어떤 종류의 미디어에 속해있는 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제는 역할이 저널리즘을 판단하게 된 것이다. 다만, 이것이 기존의 저널리스트들에게 심각하게 문제가 되고 있다면 그것은 저널리즘으로 돈을 받는 사람들만 존재하던 것이, 돈을 받지도 않고도 더욱 강력한 저널리즘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전통적 의미의 저널리즘 주체들은 돈 값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UCC나 블로그에서 나타나는 저널리즘을 비전문적이라고 부정 한다고 해서 전통 저널리즘 주체들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엄연한 새로운 저널리즘의 주체가 탄생한 것은 막을 수 없다. 결국, 저널리즘의 전문가로서 인정받거나 신뢰를 원한다면 돈을 받지 않는 비전문적 저널리즘 주체들이 해내는 만큼 그 이상을 해내는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전문적 저널리즘이 발생하는 이유, 또는 저널리즘 그 존재의 이유, 독립적인 진실에의 탐구에 더욱 전문적으로 다가가는 수밖에 없다.

 

 

 

참고문헌

 

김병철. (2005). 온라인 저널리즘의 이해. 서울: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빌 코바치, 톰 로젠스틸. 이종욱 역. (2008). 저널리즘의 기본요소. 서울: 한국 언론재단

우병동, 정일형, 김용성. (2007). 뉴미디어 저널리즘. 부산: 세종출판사

이민웅. (2003). 저널리즘: 위기변화지속. 서울: ()나남출판

최민재. (2007). 동영상 UCC와 저널리즘. 서울: 한국언론재단.

필림 마이어. 성동규, 김광협 역. (2008). 디지털 시대 저널리즘 구하기. : 커뮤니케이션북스()

 

Posted by 허호필